
1980~9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점차 존재감을 잃어가던 그들이 최근 '제2의 반도체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공급망 재편과 미국의 기술패권 전략, 대만·중국의 리스크 등 복합적 요인들이 일본을 다시 주목받게 만든 것이다. 특히 TSMC의 구마모토 공장 가동, 라피더스의 차세대 반도체 공정 도전 등은 단순한 회복을 넘어 '부활'의 신호탄으로 여겨진다. 과연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현재 상황과 성장 요인, 주요 기업들의 전략, 글로벌 시장에서의 포지셔닝, 그리고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본다. 특히 최근 가동된 구마모토 공장 사례를 중심으로 공급망 안정화 전략과 인공지능 시대에서 일본의 기술적 위상까지 함께 조명한다.
다시 뜨는 일본, 배경엔 '공급망 안정화'가 있다
최근 몇 년간 전 세계는 팬데믹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해 반도체 공급망에 큰 혼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은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전략적 파트너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안정된 제조 기반'과 '첨단 소재 기술'을 무기로 재조명 받고 있다.
특히 반도체 소재와 부품에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하는 일본은 공급망에서 중간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실리콘 웨이퍼, 에칭 가스 등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원자재는 여전히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어 ‘전략적 제조 파트너’로의 역할 전환을 의미하며, 미국과의 연합을 통해 그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TSMC와 구마모토 공장, 부활의 상징이 되다
2024년 2월, 일본 구마모토에 위치한 TSMC의 공장이 공식 가동을 시작했다. 이 공장은 일본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약 4760억엔)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 소니와 덴소 등 일본 굴지의 기업들과 협업하여 실리콘 생산을 본격화했다. 이는 단순한 해외투자 유치가 아닌, 일본 내 첨단 반도체 생태계 복원의 신호로 해석된다.
TSMC가 선택한 이유는 일본의 정치적 안정성, 인프라, 인력 기술력, 그리고 풍부한 소재 공급망 때문이다. 특히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소니의 이미지 센서와의 시너지 기대는 글로벌 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다시금 반도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으며, 구마모토 모델은 향후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일본 정부의 공격적 투자, '라피더스'로 미래를 연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라피더스(Rapidus)라는 국책 기업을 설립하며 미래 반도체 공정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라피더스는 IBM, 도쿄대, 그리고 글로벌 소재·장비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2nm 이하 첨단 공정 개발에 나서고 있으며, 이를 통해 2027년까지 양산 체계를 구축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약 3300억 엔을 투입하며, 미국 정부와도 공동 기술 개발 MOU를 체결하였다. 이는 단순히 시장 경쟁력을 넘어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일본의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특히 미국과의 기술 연합은 TSMC 외의 또 다른 공급망 다변화로 평가되고 있다.
소재·장비 강국 일본, 실속 있는 부활의 핵심
일본이 반도체 산업에서 다시금 힘을 얻는 데에는 그동안 꾸준히 유지해온 소재·장비 기술력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포토레지스트, 에칭 가스, CMP 장비 등에서 일본의 기술은 독보적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 대만, 심지어 한국에서도 대체하기 어려운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EUV 노광 공정의 핵심 소재를 다수 공급하는 일본은 차세대 반도체 제조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 부활이 아닌 '핵심기술 중심'의 재도약으로 평가된다. 일본이 단순히 조립과 생산을 넘어서 연구개발 중심지로 전환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일본의 전략적 포지셔닝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은 미중 갈등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일본은 미국 및 유럽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대만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심화됨에 따라 '제3의 안정지대'로서 일본이 각광받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공장 하나가 아닌, 공급망 전체를 다변화시키는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가치다.
또한 일본은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복원하고자 인재 육성과 교육 인프라에도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산업부, 경제산업성, 교육기관이 연계된 이 거버넌스 체계는 과거와는 다른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가능한 산업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되고 있다.
한국과의 경쟁 또는 협력? 향후 시사점
일본의 반도체 산업 부활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단순한 경쟁이 아닌, 전략적 협력의 가능성도 함께 열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재·장비 분야에서 일본과의 기술 교류 및 공동 R&D는 상호 보완적인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반면, 첨단 공정 및 파운드리 경쟁에서는 더욱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도 일본의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하고, 독자 기술력 강화 및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병행해야 한다.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닌, '기술 기반의 생태계 구축'이야말로 일본 사례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앞으로 한일 양국의 반도체 산업은 경쟁과 협력을 병행하며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